본문 바로가기

REVIEWS/ALT & INDIE

SLOW CLUB: Paradise (2011)


한 20년 전쯤 되었나. 케이블 방송 자체가 없었던 그 시절 공중파 TV에서 데이빗 린치가 감독한 불후의 컬트드라마 '트윈픽스'가 매주마다 꽤 오랜 기간동안 방송되었던 적이 있었다. 근친 뉘앙스에 엽기적 플롯이 남발하던 그 드라마가 공영방송 KBS에서 방영되었다는 사실이 지금 생각해도 거의 기적에 가까운 사건이었는데, 덕분에 데이빗 린치는 한국 영화팬들 사이에서 거장 반열에 무난히(?) 무혈입성하는 데 성공하고 '트윈픽스' 덕에 그가 만든 다른 여러 역작들도 연이어 절찬리에 개봉되면서 척박한 문화환경에서 특이한 예술영화들을 갈망하는 영화키드들의 심금을 울렸다. 그런데 데이빗 린치의 작품 중 국내에 최초로 공개된 작품은 '트윈픽스'가 아니라 바로 장편영화 '블루벨벳'이었다(1992년에 개봉!). 이 때문에 분명 많은 국내 영화 매니어들에겐 '트윈픽스'나 다른 데이빗 린치 영화들보다 '블루벨벳'에 아직도 나름 애착이 더 클 터인데, 혹시 이 영화에서 여주인공 이사벨라 로셀리니가 느릿느릿 연주되는 재즈 배킹에 맞춰 "Blue Velvet"을 불렀던 오묘한 분위기의 음악 클럽 '슬로우' 를 혹시 기억하고 있는가.

이번에 소개할 잉글랜드 쉐필드 출신의 혼성 인디록 듀오 SLOW CLUB은 바로 이 '블루벨벳'의 클럽 '슬로우' 에서 밴드 이름을 가져왔다. 허나 이들은 데이빗 린치의 영화나 안젤로 바달라멘티의 OST와는 달리 그다지 실험적이고 이질적인 음악을 구사하는 팀이 아니라는 사실을 일단 숙지하기 바란다. SLOW CLUB은 데뷔 당시 나름 브리티쉬 포크의 명맥을 잇고자 하는 의지를 보임과 동시에 인디록 특유의 로-파이 스타일을 포크 기반의 음악 프레임 안에 접목하여 상당히 멜로우하면서도 하모니 지향의 인디팝 음악을 구사하는 데 몰두했었다. 이번에 발매된 두번째 앨범 [Paradise]는, 포크에 컨트리적 요소까지 대폭 첨가된 아메리카나(Americana) 스타일이 크게 드리워졌던 데뷔 앨범 [Yeah So (2009)]에 비해 '아메리카적' 인 감수성은 조금 빼내고 로-파이 인디록 특유의 자유롭고 활력넘치는 모드를 배가시켜내면서 은근히 듣는 재미와 다채로움, 그리고 트렌디한 맛이 전작보다 훨씬 풍부해진 음악적 퀄리티를 보여준다.

앨범의 초반부에 포진한 "Two Cousins"와 "If We're Still Alive"를 들어보면 SLOW CLUB이 이번 앨범에서 반영하고자 하는 '취향의 변화'를 가장 효과적으로 체험할 수 있을 터인데, 오프닝 트랙 "Two Cousins"에서는 다층 보컬 레이어와 함께 프리 패턴의 하이햇+스네어 드러밍이 귓가를 때리는 가운데 BEN FOLDS FIVE 스타일의 방방뜨는 피아노 리프까지 더해지면서 포크성향 밴드들의 보편적 특징인 보컬 위주의 음악이 아닌 인디록 밴드로써 인스트루멘탈 유닛 상호간의 콤비네이션을 더 강조하려는 의도를 읽어낼 수 있으며, 두번째 트랙 "If We're Still Alive"에서는 육중함과 상승감이 동시에 표현가능한 플로어탐의 질주감 넘치는 비트와 단순하지만 또렷하게 귀를 자극하는 기타 리프가 혼연일치되면서 공식에 얽매이지 않고 '젊은 밴드' 답게 자유롭고 자신감 넘치게 플레이하려는 이들의 새로운 노림수를 떠들썩하게 표현해낸다. 이 초반부 트랙들은 마치 ST. VINCENT의 [Strange Mercy] 앨범의 수록곡을 듣는 듯 원시적인 싱코페이션 리듬 패턴의 드럼 비트가 음악의 뼈대를 이루어 발랄하면서도 에너지 넘치는 젊은 인디록 음악의 진수를 맛보기에 부족함이 없다.

이번 앨범에서 두드러지는 점은, 레베카 테일러(드럼)의 보컬 비중이 전작 [Yeah So]에서보다 훨씬 높아졌다는 것인데, 물론 파트너 찰스 왓슨(기타)가 보컬을 리드하는 "Horse Jumping", "The Dog" 같은 트랙이 수록되어 있긴 하지만 전반적으로 보컬리스트로써 그의 활약상은 [Yeah So]에 비해 레베카 테일러의 보컬 레이어 뒷쪽으로 빠지면서 훨씬 줄어든 듯한 인상을 준다. 따라서 듀엣 보컬의 측면에서 콤비네이션적 요소는 전작보다 줄어든 건 사실이지만, 보컬 기량에 있어서는 레베카 테일러가 찰스 왓슨보다 훨씬 안정감과 특색있는 톤과 노트를 가지고 있는데다 전작 [Yeah So]의 보컬 하모니 자체도 혼성듀오 특유의 조화로운 매커니즘으로 완벽하게 이루어졌다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으로써 레베카 테일러의 보컬 위주로 [Paradise]의 전체적 프레임워크를 통일시켜나간 점만큼은 상당히 적절한 선택이라고 보여진다.

SLOW CLUB이 데뷔앨범 [Yeah So]부터 자신들의 포크의 음박기반에서 순수하게 우러난 발라드 본능은 이번 신작 [Paradise]에서도 상당 분량을 할애하면서 지속적으로 드러내보이는데, 아쉽게도 "Never Look Back", "Hackney Marsh", "Gold Mountain" 등 슈게이징과 슬로우코어가 가미된 포크 넘버들이 위에 언급한 "Two Cousin"와 "If We're Still Alive", 그리고 "Where I'm Walking", "Beginners" 같이 생기넘치는 기타+드럼 콤보 록 넘버들의 완성도나 개성을 뛰어넘지 못하는 평이한 포크 센스를 보여준다. 포크 싱어로써 레베카 테일러의 역량은 물론 괜찮은 수준의 것이긴 하지만 동향(세필드 출신) 선배 포크 싱어송라이터 케이트 러스비(Kate Rusby)나 로라 말링 등 그외 비슷한 연배의 브리티쉬/영어권 포크 싱어들에 비해 그다지 특출한 개성을 찾아보긴 힘들다. 물론 왓슨-테일러간의 달달한 보컬 하모니가 유독 포크 넘버들에서 더욱 완성된 형태를 띄고는 있으나(특히 "Gold Mountain" 같은 곡), [Paradise] 앨범의 핵심인 찰스 왓슨-레베카 테일러의 연주는 다른 업비트 록 트랙들에 비해 포크 넘버에서 특유의 생동감이나 톡톡 튀는 개성이 양껏 발휘되지 않으며 가사 역시 포크 노랫말치고는 의외로 상당히 평이한 수준으로 다가온다. 따라서 포크/보컬 친화적인 면모를 과도하게 발휘하는 것보다 인디 텍스쳐와 날카로움을 겸비한 왓슨의 기타웍, 인디 스타일이 쫙 배여있는 스탠딩 드럼의 진수를 보여주는 테일러의 에너지 넘치는 손놀림을 좀 더 특화하여 앨범의 전면에 두루 사용해냈다면 훨씬 더 놀라운 걸작이 만들어졌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VIOLENT FEMMES(그렇다, 이 레전드 트리오에도 스탠딩 드러머가 있었다!), FIERY FURNACES같은 미국 로파이 인디록과 영국식 취향의 트위(twee)+챔버팝을 접목시켜 흥겨움과 에너지, 생동감을 무리하지 않고 미니멀 형태의 패턴으로 뽑아내는 [Paradise] 속 록비트 트랙들은 분명 [Yeah So]에서의 그것과는 분명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며 평균 수준으로 뱉어내는 포크 감수성의 결점들을 충분히 상쇄하고도 남을 만큼의 보석같은 매력을 발산한다. 행여나 SLOW CLUB이 만든 포크나 발라드 트랙들을 굳이 앞으로도 계속 들어야 한다면 클로징 트랙 "Horses Jumping" 처럼 재미난 연주들이 슬로 템포 보컬과 함께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뒤섞이는 패턴의 노래들을 듣고 싶은데, 잠재력을 무궁무진하게 갖춘 밴드이니만큼 다음 앨범에서 훨씬 성숙되고 발전된 모습을 충분히 기대해봐도 좋을 듯하다.

[Paradise]는 전작 [Yeah So]에 비해 완성도가 한 레벨 상승한 작품임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지만, 행여나 [Paradise] 감상 중 포크 무드에 지겨움을 느낀다면 재빨리 트랙을 스킵하고 록 넘버들만 골라 들어라. 그것만 들어도 충분히 이번 앨범을 즐겁게 감상하고도 남을 테니까.

 
RATING: 75/100

written by
BKC

'REVIEWS > ALT & INDIE' 카테고리의 다른 글

CHELSEA WOLFE: Apokalypsis (2011)  (0) 2011.10.30
ZOLA JESUS: Conatus (2011)  (1) 2011.10.22
CAVE: Neverendless (2011)  (3) 2011.10.06
NEON INDIAN: Era Extrana (2011)  (1) 2011.09.26
GOTYE: Making Mirrors (2011)  (4) 2011.09.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