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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S/ALT & INDIE

KURT VILE: Wakin On A Pretty Daze (2013)


"wakin on a pretty day"

언젠가부터 커트 바일(Kurt Vile)은 인디 음악을 격하게 사랑하는 미국 힙스터들에게 정신적 지주와도 같은 존재로 여겨지고 있다. 힙스터의 선배격라고 할 수 있는 90년대 그런지(grunge) 추종자들의 영웅 에디 베더(Eddie Vedder)를 연상시키는 장발 파마머리와 구제 상하의, 여기에 꾸질꾸질한 검은색 가죽 재킷으로 화룡점정을 한 커트 바일의 스타일은 마치 뉴욕 브루클린에 새둥지를 틀고 작은 인디 포크 클럽들을 떠돌아다니는 전직 시애틀 그런지 밴드 기타리스트의 풍모를 연상시킨다고나 할까.

구제를 걸친 브루클린 힙스터 거지 스타일을 어느 누구보다도 잘 소화하는 간지와 세상의 짐을 다 짊어진 듯 무표정하고 쓸쓸한 '앵그리 그런지 로커' 인상의 소유자 커트 바일이 진정으로 탐구하는 매개체는 엉뚱하게도 아메리카나와 포크록인데, 그런 의미에서 자신의 음악세계를 위해 노골적으로 '따라하고자' 하는 대상이 에디 베더나 커트 코베인이 아니라 제임스 테일러, 탐 페티같은 7-80년대 미국의 AOR 성향 포크록 음악이라는 건 참으로 의외가 아닐 수 없다. 무덤덤한 보컬 어조와 정직한 기타 타법(엘렉트릭과 어쿠스틱을 혼용), 그리고 감상적인 필치의 가사들이 느긋하게 어우러진 전작 [Smoke Ring for My Halo (2011)]에서 우린 그의 제임스 테일러적이고 탐 페티적인 면모들을 아주 뚜렷하게 읽을 수 있었는데, 2년만에 선을 보인 신작 [Wakin On A Pretty Daze]에서도 이러한 AOR적 성향들이 커드 바일식 포크음악의 승리 코드로써 변함없이 사용(물론 변태적으로)되고 있음을 목격하게 될 것이다. 이외에도 [Wakin On A Pretty Daze]에는 'AOR 포크록의 인디/로파이 해석' 이라는 '대명제'의  [Smoke Ring for My Halo]에 담긴 부대적인 캐릭터들 역시 여전히 유효하게 존속한다. 갑갑한 로파이 프로덕션, 냉소와 무관심이 공존하는 '묻지마' 포크감성, 그러면서도 찌질함과 소심함을 질질 흘려대는 자뻑 인디 싱어송라이터들과는 달리 쿨하고 쉬크하게 자신의 감성온도를 유지시키는 불굴의 여유로움.

하지만 [Wakin On A Pretty Daze]에는 무신경 포크 마인드와 함께 영원히 인생을 유유자적할 것만 같은 의도적 '게으름' 혹은 '태만함'에서 깨어나 뮤지션으로서 성취를 보고자 하는 커트 바일의 음악적 열망이 작지만 또렷하게 번득임을 발견할 수 있다. 이는 앨범 커버에도 아주 잘 나타나 있다. DIY 로파이를 대놓고 자랑하듯 껌껌한 지하실 방의 소파에 앉아 고립된 인디 음악인의 분위기를 흑백이미지와 함께 칙칙하게 자아내는 [Smoke Ring for My Halo]의 앨범 재킷... 그러나 이번 [Wakin On A Pretty Daze] 앨범의 총천연색 커버를 보라. 지하실에서 히키코모리 생활을 주로 할 것만 같은 우리의 커트 바일님이 답답하게 그늘진 지하실을 박차고 구름 한점 없는 하늘 아래 따뜻한 햇살이 한껏 드리워진 바깥 세상으로 나와 포즈를 취하고 있는 것! 전작과는 완전 다른 스타일의 이미지가 담긴 [Wakin On A Pretty Daze]의 커버는 귀차니즘의 기지개를 펴고 폐쇄적인 공간에서 벗어나 이번 앨범에서 작지만 또렷하게 취해진 커트 바일의 진보적 어프로치와 음악적 열정을 시각적으로 예견케 해주는 중요한 단서나 다름 없다. 한층 밝아진 사운드. 훨씬 홀가분해진 감성. 하지만 포크싱어보다는 로커삘을 더 살려 어필하는 듯한 냉소적 위트의 강렬함 등은 [Wakin On A Pretty Daze]를 통해 커트 바일이 취하고자 한 가장 대표적인 변화들일 것이다. 또한 4분 안에 황급히 끝내버리는 식이었던 트랙들의 길이는 4분, 5분, 6분, 7분, 8분, 9분, 10분까지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 전작에서 없었던 '로파이 기타 스페셜리스트' 커트 바일의 다채로운 연주 어프로치들이 대거 등장하게 된다. 덕분에 [Smoke Ring for My Halo]에서 귀차니즘과 허무주의에 의해 숨겨졌던 커트 바일의 음악적 열정과 잠재력까지 봄날의 햇살처럼 조심스러우면서도 상큼한 빛을 이번 앨범에서 발하게 된 것. 

[Wakin On A Pretty Daze]의 보석은 뭐니뭐니해도 수려한 핑거 피킹(클래식 기타 연주자나 마크 노플러처럼 피크 없이 손가락으로 기타줄을 튕기는 주법)에서 터져나오는 다채로운 기타 리프일 것이다. 앞서 언급한 대로 전작보다 두 배 이상 늘어난 트랙의 러닝 타임에 합당하게 코드웍, 아르페지오, 솔로리프를 넘나들며 여유롭고도 알찬 연주를 펼치는 커트 바일의 기타 솜씨는 전작보다 곱씹을 만한 구석이 훨씬 더 많아졌으며 일렉과 어쿠스틱의 대조되는 기타 소리를 적절하게 레이어링하여 길어진 곡 길이에도 결코 지루하지 않은 시퀀스를 구성지게 만들어낸 명장 존 아그넬로(DINOSAUR JR.와 SONIC YOUTH의 앨범을 제작!)와 커트 바일(그는 아주 훌륭한 엔지니어이기도 하다)의 스튜디오 작업 역시 결코 칭찬이 아깝지 않다.  

첫번째 트랙 "Wakin on a Pretty Day"는 전작에서의 '유유자적'은 유지하되 이번만큼은 따뜻하고 긍정적인 마인드로써 뭔가를 한번 보여줘야겠다는 커트 바일의 변화된 마음가짐을 가장 확실하게 대변해주는 곡일 것이다. 허밍하듯 흐릿한 억양으로 무관심하게 읋조리듯 불러대는 포크 보컬 스타일은 당삼 커트 바일 음악의 대표적인 요소일 터이지만 암흑의 염세주의보다는 백일몽적인 나른함을 부르는 보컬 감성은 우울함이 지배적이었던 전작과는 달리 리스너에 긍정적인 심상들을 솔솔 불어넣는다. 여기에 세 개의 레이어에서 제각기 다른 스케일로 전개되는 기타 리프들은 9분 31초라는 엄청나게(?) 긴 시간에도 아랑곳없이 노년기 에릭 클랩튼의 풍모를 연상시킬 정도로 느긋하면서도 부드럽고 능숙하게 구사되는데, 특히 마지막 2분여 동안 쉬지 않고 세 개의 멀티 레이어를 타고 구성지게 펼쳐지는 기타 솔로는 절대 튀지 않으면서 커트 바일 자신이 구사하고픈 기타 멜로디훅의 모든 것을 쏟아내는 기염을 토한다. 혹자는 전작의 폐쇄적인 염세성이 마크 코젤렉(Mark Kozelek)의 스타일과 흡사하다고 말하는데, 그렇다면 이번 앨범에서 소박하지만 밝은 어투로 구성진 멜로디훅을 담담하게 끝판까지 뽑아내는 그의 능글맞음은 마크 코젤렉보다는 LUNA 시절 딘 웨어햄(Dean Wareham)의 기타+보컬 콤보 스타일을 닮았다고 말하는 게 가장 정확한 비유가 아닐까 싶다.  

두번째 트랙 "KV Crimes"는 클래식 AOR 포크록의 영향력이 가장 강하게 느껴지는 곡으로써, 특히 게으름이 줄줄 흐르는 듯한 커트 바일의 보컬 스타일과 초장부터 폭발(?)하는 디스토션 기타리프, 그리고 포효하는 듯한 탄성소리(2:58) 등은 힘빠지는 허무톤 보컬과 이에 상응하는 펑크록풍 초간결 기타 코드웍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탐 페티(Tom Petty)의 아우라가 유독 느껴지는 부분들이다. 하지만 루 리드(Lou Reed)식 냉소를 머금은 듯한 비음 섞인 보컬과 AOR 음악으로 보기엔 다소 신경질적으로 내뿜는 거친 디스토션 기타 음색은 '감미롭기만 한' 탐 페티/AOR 포크를 넘어 그동안 꼭꼭 숨겨왔던 커트 바일의 인디로커(혹은 그런지 로커?!?!?!?) 다운 터프 기질을 다분히 엿볼 수 있는 곡이기도 하다. 

다양화된 어프로치의 진면목은 세번째 트랙 "Was All Talk"에서도 드러난다. 카우벨 음향과 드럼 프로그래밍을 삽입하여 전작에선 드물었던 기계적인 비트감과 리듬감을 한껏 살려내면서 8분 남짓의 긴 시간 동안 진행되는 무신경한 몽상가를 아주 상쾌한 기분으로 감상할 수 있게끔 해준다. 특히 어쿠스틱 기타의 아르페지오 소리, 일렉 기타의 클린톤, 사이키델릭 펑크풍의 '뭉개지는 듯한' 노이즈/디스토션 기타리프가 펼쳐내는 주옥같은 로파이 기타 앙상블은 그동안 감춰둔 커트 바일의 '록 기타리스트' 연주 본능이 제대로 반영된 이번 앨범만의 매력 중 한 대목일 것이다.

"Shame Chamber"는 과거 탐 페티 등의 포크록 뮤지션들이 보여줬던 히피/노동자 성향의 우울 모드를 2013년 힙스터의 똘끼로 리메이크한 곡에 다름아닐 것이다. [Smoke Ring for My Halo]에서의 무관심과 무뚝뚝함은 여전하지만 양지의 볕이 이곳저곳 드리워진 [Wakin On A Pretty Daze]의 분위기에 어울리게 밝고 따뜻한 느낌으로 연주되는 배경 사운드는 리스너의 흥을 돋우는데 부족함이 없다. 탐 페티 음악처럼 탁하면서도 산뜻하게 연주되는 기타리프와 딱딱거리는 카우벨 소리는 사실 별거 아니지만 이 곡에 맞춰 흥겨운 리듬감을 타기엔 더없이 안성맞춤인 추임새들. 이 곡의 또다른 하이라이트는 짧지만 강하게 괴성 내지르듯 하는 포효 소리. "오우!"를 연발하며 장난스러움과 똘끼를 작렬시키는 모습에서 우리는 [Wakin On A Pretty Daze]을 통해 커트 바일이 지향하고자 하는 '긍정적인 나르시시즘'이라는 건강한 힙스터의 마음가짐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10분 26초의 어마어마한 러닝타임으로 마지막 승부를 거는 "Goldtone" 역시 클로징 트랙답게 기존의 커트 바일이 추구했던 짧은 소품 스타일과는 사뭇 다른 대작의 풍모를 물씬 풍기지만, 커트 바일이 이번에 추구하고자 하는 색다른 어프로치는 클로징 트랙 바로 앞에 포진한 필러(filler)성 10번 트랙 "Air Bud"에서도 눈에 띄게 돌출된다. [Smoke Ring for My Halo]의 유일한 해피 무드 트랙 "In My Time"처럼 DIY/베드룸 사운드 감촉의 일렉트로 비트로 인트로를 장식한 이 트랙에서 커트 바일은 우주적인 느낌을 자아내는 신쓰 드론 노이즈를 살짝 첨가하여 포크적 분위기를 사이키델릭 팝의 황홀경으로 일시에 바꿔놓는 재기어린 시도를 감행한다. 특히 종반부에서 피드백까지 곁들여진 슈게이징풍 기타 사운드에 이어 등장, 곡을 깜찍하게 매조지하는 키보드 셔플은 이번 앨범을 통해 자신의 음악세계를 밝고 활발하게 전환하고자 한 커트 바일의 의도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어프로치일 것이다. 

커트 코베인같은 터프+염세주의 그런지 로커를 꿈꾸다 자의반 타의반(Grunge is dead!)으로 좌절, 통기타와 함께 나홀로 포크 음악을 흥얼대며 집안에서 세월을 보내다 어느날 갑자기 바깥 세상과 소통하고자 하는 열망으로 자신의 기타를 집어들고 껌껌한 지하실방에서 나와 브루클린(아, 물론 커트 바일의 본거지는 필라델피아이지만) 교외의 양지바른 무대에서 "Snowflakes Are Dancing" 같은 인디록 넘버를 연주하며 젊은 힙스터 거지들에게 환호성을 받는 장발의 매력남. 이 간지남이 바로 커트 바일이며 신작 [Wakin On A Pretty Daze]는 '힙스터 제임스 테일러(혹은 탐 페티)'가 아닌 '힙스터 (브루스) 스프링스틴'이 되기 위해 기지개를 펴기 시작한 그의 숨겨놓은 로커 본능이 쉬크한 포크 감성과 함께 조심스럽게 '작렬(?)'한 작품이다. DIY/베드룸 시절의 겸허함에서 우러나오는 넉넉한 여백감과 로파이 음향, 그리고 무덤덤+무관심 속에서 뽑아내는 불멸의 멜로디 훅 등 [Smoke Ring for My Halo]에서 보여줬던 장점들을 그대로 지니고 있으면서도 프로페셔널으로서 훨씬 다양해진 루트와 도구로 음악적 기량과 열정을 과시하고 더 나아가 '힙스터 스프링스틴'이 되기 위해 대중들에게 좀 더 현실적으로 다가서려는 '잠재적 로커' 커트 바일의 열린 사고들이 훌륭한 결실을 맺은 작품이 바로 [Wakin On A Pretty Daze]인 것이다. 사실 이 앨범은 리뷰가 구차하게 필요가 없을 정도로 누구든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는 묘한 대중친화력으로 넘쳐나는데, 인디 음악에 대해 심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 이들도 예전 본 이베르의 [Bon Iver]만큼이나 술술 쉽게 청감할 수 있을 포크성 인디 앨범이 바로 본작일 것이다.       


RATING: 85/100

written by BK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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