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REVIEWS/ELECTRONIC

BURIAL: Kindred EP (2012)


세계대전 이후 예술영화사조를 논함에 있어서 빠뜨릴 수 없는 프랑스 누벨바그 운동을 이끌었던 두 거장 감독 프랑소아 트뤼포장 뤽 고다르 모두 '누벨바그'라는 깃발 아래 새로운 영화적 문법을 동반자적으로 써내려갔음에도 스타일만큼은 서로 상당히 대조되는 작가주의 노선을 걸었던 인물들이었다. 트뤼포의 영화는 스타일에 과도하게 얽매이지 않고 항상 영화 텍스트와 관객 간에 공감대와 감정이입의 여지를 사려깊게 열어두려는 경향이 있는 반면, 고다르의 영화는 작가 자신만의 언어/메시지와 영화적 수사법들을 우위에 놓고 이를 몰대중적으로 풀어해치는 폭력적 악순환을 지리하게 반복한다. UK 덥스텝의 두 간판스타 제임스 블레이크(James Blake)와 윌리엄 베반(William Bevan)은 엄연히 '덥스텝'이라는 동일한 카테고리에 속해있지만, 대중소통면에서나 음악적 디렉션/스타일면에서나 동일한 지점 위에서 180도 반대 방향으로 서로 등을 돌리고 서있는 듯한 태도를 취한다. 마치 서두에서 언급했던 트뤼포와 고다르의 대조적인 모습을 연상시킨다고나 할까. 작년 발표한 정규 앨범 [James Blake]을 통해 제임스 블레이크가 추구하고자 했던 어프로치들은 흥행이 어느정도 가능했던 트뤼포의 영화들처럼 분명 팝 지향적인 대중소통을 수반하는 것이었다. 또한 그의 음악 외적 이미지는 어떤가. 어디에선가 한 번쯤 만나봄직한 친숙한 외모(마치 트뤼포처럼), 그리고 미디어 노출을 마다하지 않는 태도 때문에 마치 틴아이돌 스타인 것처럼 그에 열광하는 이들도 분명 적지 않다. 반면 윌리엄 베반은 그에 관한 백그라운드가 데뷔 앨범을 발표한 이후에도 한동안 알려지지 않을 정도로 지극히 미스테리한 면모를 지속적으로 유지하면서 미디어와의 인터뷰 역시 극도로 꺼리는 모습을 보여왔으며(그의 실제 모습이 대표작 [Untrue (2007)]가 발표된지 일년이 지나서야 언론에 공개될 정도였으니...), 자신의 신비주의적 캐릭터만큼이나 도발적/전투적/비타협적/반대중적인 스타일을 덥스텝 컨셉트에 접목하는(마치 고다르의 영화들처럼) 등 동시대 프로듀서들 중 '자기만의 노선'에 대한 아웃사이더적 외골수 태도들을 모니커 'BURIAL'의 셀프 데뷔 앨범 [Burial (2006)] 이후 확고부동하게 지켜오고 있다.

라운지 재즈/테크노, R&B, 앰비언트, IDM의 고급스러운 캐릭터들을 다크한 컬트/호러 무드와 캐러지 텍스쳐로 침식/변형시키고 여기에 덥스텝 본연의 변칙성 필로쏘피에 의거하여 미니멀하면서도 변덕스러운 엑센트들을 비트와 샘플링(특히 보컬 파트)들에 공격적으로 가미하면서 보편적인 스트레이트성 일렉 사운드들에서 접할 수 없는 '친근한 4/4 템포의 불편함'과 '악몽스러운 흥겨움' 의 이율배반적 조합들을 키취적이면서도 학구적으로 구현해냈던 [Untrue]은 분명 2000년대 최고의 컬트 걸작으로 불리워도 손색이 없는 작품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상 BURIAL 사운드의 스트럭쳐를 해부해본다면 다른 음악장르들에서 자주 목격되곤 하는 복잡/난해한 형이상학적 도식들은 그다지 발견되지 않는다. 즉, 철저한 UK개러지 삘과 미니멀리즘만으로 승부함(이것들이 바로 덥스텝과 '덥스텝 사촌' 드럼앤베이스 간에 보편적으로 정의되는 '차이'의 시발점이기도 하다)에도 불구하고 보컬 샘플들을 극도로 왜곡시켜 변조/커팅하는 센스와 불규칙한 미니멀 비트들을 진중하게(IDM을 능가하는) 어레인지하는 테크닉, 그리고 파인 아트 사운드 아티스트나 앰비언트 장인들에 버금가는 서사적 테마/사운드스케잎 창조 능력에 힘입어 기존의 UK 개러지와 덥스텝에서 접할 수 없었던 폐쇄공포적 밀도감과 텐션감, 그리고 다크 앰비언트풍 사운드스케잎 등에 지배되는 이질적 형태의 BURIAL식 덥스텝 사운드 정의를 바로 [Untrue]에서 써내려갔던 것이다.   

작년 발표된 [Streer Halo]에 이어 올해 선을 보인 BURIAL의 새로운 EP 앨범 [Kindred]는 극적인 장르 해체와 재창조에 '핀트'가 맞춰졌던 [Untrue]의 도발적 논조와 비교할 때 '개척자'로써 또다른 혁신이 동반된 다이내믹한 무브먼트를 크게 보여주는 작품이 아니며(EP라는 포맷의 한계 때문일수도), 오히려 [Untrue]와 [Street Halo]에서 뚜렷하게 나타났던 'BURIAL표 다크 덥스텝'의 사운드스케잎과 무드를 그대로 계승하고자 하는 의도가 더 크게 드러나있는 작품일 것이다. [Kindred]는 [Untrue]에서 즐겨 구사했던 덥스텝 특유의 투박한 비트 적용의 혁신성을 좀더 절제하는 대신  BURIAL 음악 특유의 다크한 맛을 전체적 문맥과 스토리라인 안에서 일관적/지속적으로 살려내는 데 더 강한 포인트를 둠으로써 전반적으로 이전 앨범들보다 훨씬 더 유기적인 형태의 다크 무드를 연출해내고 있다. 물론 '걸작' [Untrue] 역시 다크한 무드가 전체적으로 생생하게 살아있는 앨범이었지만 50분 분량의 앨범에 수록된 13개의 트랙들 중 대다수가 3~4분의 짧은 러닝타임인데다 트랙들마다 서로 다른 전개방식와 캐릭터를 제각기 갖고 있기 때문에 '컨셉트형' 앨범으로 불리워지기엔 다소 무리가 따르는 구성이었다(묵직한 앨범 전체의 분위기와는 사뭇 다른 클럽용 경량급 무게감으로 R&B 댄스 바이브를 흘렸던 "Archangel"같은 이질적 트랙들의 존재감이 바로 그 대표적인 예다). 이에 반해 (비록 31분 러닝타임의 EP 앨범이지만) 두 개의 11분짜리 대곡에 7분 30초짜리 롱 트랙 하나가 중간에 첨가된 [Kindred]은 이 점에서 단타 구성으로 일관했던 [Untrue]보다 서사적 구도를 일관적으로 서술할 수 있는 기본 골격을 충분히 갖추고 있는데다 긴 러닝타임 동안 벌어지는 전개들 역시 그 긴 시간이 전혀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예측 불가능한 패턴/스토리라인과 미묘한 디테일을 아기자기하게 담고 있어 상당히 이채롭다. 실례로 대표 트랙 "Kindred" (11:28)와 "Ashtray Wasp"(11:45)의 공통적인 특징이 있는데, 이 트랙들 모두 전반부에서 덥스텝 엇박 비트("Kindred")와 트랜스/하우스 템포("Ashtray Wasp")의 '댄스' 무드를 음산하게 흘리다가 러닝타임의 중간부분부터 별안간 악몽이 그려지는 앱스트랙트(abstract) 사운드 디자인 모드로의 트랜지션을 폭력적으로 자행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Ashtray Wasp"를 주의깊게 들어보라. 로테르담 가바 테크노의 폭풍우 전조를 맞이하는 듯한 인트로에 이어 130 BPM에 맞춰 은은하게 터져나오는 신쓰 리프와 R&B 바이브는 마치 FOUR TET과 톰 요크(Thom Yorke)의 콜라보 EP에서 보여준 가벼운 유로 일렉트로니카/하우스 팝의 그루브 무드를, 예사롭지 않은 정교함으로 부지런하게 떠들어대는 하이햇과 잡동사니 비트들의 컴비네이션은 '덥스텝스러운' 이단적인 풍모를 더불어 과시하지만, 트랙의 절반에 다다를 무렵 이러한 트랜스/하우스 템포 그루브는 일시에 제거되고 로파이 무드를 가중시키는 턴테이블 잡음, (BURIAL의 장기이기도 한) 변조/조작된 보컬 샘플 패치들, 메트로놈 비트, 미니멀하게 정렬된 퍼커션 사운드들이 혼합되어 마치 어두컴컴한 심연 속에서 흘러나오는 듯한 무겁고 음침한 네거티브 사운드를 멋지게 주조해낸다. 이러한 앱스트랙트 사운드 프로듀싱법은 과거 [Untrue]가 추구했던 프로듀싱법과 살짝 다른 것으로써, UK개러지가 태생적으로 지니고 있는 댄스 무드를 최대한 죽이거나 변형시키고([Kindred]가 지속적으로 풍겨대는 트랜스 무드 역시 '트랜스' 라는 포지티브한 스타일과는 정반대의 형질으로 지독하게 왜곡되어 있다) 비트의 변칙적 어레인지보다는 다크한/컬트적인 사운드스케잎의 전체적 분위기 조성에 무게중심을 두면서 전작들보다 훨씬 더 폐쇄적이면서도 이질적인, 하지만 그 불규칙성을 승화시켜 한층 더 유기적이고 서사적인 풍모의 추상화 그림을 그려낼 수 있었던 것이다.

[Kindred]는 비록 EP 앨범이지만 윌리엄 베반은 이 30분의 분량 안에서 상당히 많은 것을 이루어냈다. 특정한 패턴과 템포가 이어지다 별안간 사그라들고 또다시 새로운 패턴과 무드로 트랜지션이 이루어지는 수록곡들의 플롯과 스트럭쳐는 논리적인 시각으로 분명 불안한 부조리의 서사 구조를 띄지만 윌리엄 베반만이 가진 날카로운 샘플 재단/재구성 능력(특히 보컬 샘플 사용 능력은 역대 최고의 수준이 아닐른지)과 사운드스케잎 창조 센스에 의해 이러한 부조리 엇박자 서사 구조와 이질적 사운드 꼴라쥬가 오히려 제3의 미묘한 실험적 무드를 새롭게 자아내면서 여지껏 그가 꾸준히 구현해온 'B급 컬트/호러 영화의 덥스텝화' 라는 차갑고도 다크한 테마 시리즈 중 가장 유기적이고 일관적인, 그리고 가장 전위적면서도 논리정연한 형태의 미스테리 일렉 테마가 탄생될 수 있었던 것이다. R&B와 덥에 경도된 (포스트)덥스텝 작업 방식이 아닌 지독한 로파이와 추상적 음향 샘플, 노이즈 등을 통해 악몽의 덥스텝 시나리오를 작성하는 앤디 스톳(Andy Stott)식의 실험적 작업 방식에 훨씬 더 근접해 있는 이번 [Kindred]를 통해 우리는 '미스테리한 남자' 윌리엄 베반이 앞으로 어떤 형태의 음악적 디렉션과 방법론을 취할 것인지에 대해 비로소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어쩌면 그의 초기 음악에서 감초 역할을 했던 덥스텝 특유의 활발하면서도 긍정적인 에너지를 이제 더이상 만끽할 수 없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덥스텝을 지하 음지에서 끌어올린 견인차였던 윌리엄 베반이 이미 BURIAL 프로젝트을 통해 클럽 댄스용 UK 개러지 디제이/프로듀서로 단순규격화된 위치에서 벗어나 아트와 작가주의의 영역에 한 걸음 더 진출하기로 마음먹은 덥스테퍼라는 점을 인지한다면 이번 [Kindred]에 담긴 어프로치들은 충분히 설득력있고 납득이 될만한 성질의 것들이리라. 더 나아가 톰요크와의 콜라보 12인치 작업, [Street Halo] EP 에 이어 이번에 조용히 선보인 [Kindred]이야말로 '조용한 혁명가' 윌리엄 베반이 덥스텝을 향해 본격적으로 취하기 시작한 실험적 방향성을 군더더기없이 날카로운 형태로 음악팬들에게 드러내 보인 근래 최고의 덥스텝 아트 소품으로 손색이 없다. 덥스텝 매니어라면 꼭 이 EP앨범을 (LP판으로) 구입하도록... 


RATING: 85/100

written by BKC

'REVIEWS > ELECTRONIC' 카테고리의 다른 글

ANDY STOTT: Luxury Problems (2012)  (12) 2012.11.05
JOHN TALABOT: fIN (2012)  (5) 2012.03.01
GOTH-TRAD: New Epoch (2012)  (2) 2012.02.13
SYMMETRY: Themes For An Imaginary Film (2011)  (3) 2012.02.04
XHIN: Sword (2011)  (7) 2011.12.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