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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S/ELECTRONIC

GOTH-TRAD: New Epoch (2012)


친일파라고 쏘아붙인다 해도 상관없다. 장담하건데 천지가 개벽하지 않는 한 일본의 일렉트로닉 뮤직 선수층은 아시아권에서 톱의 자리를 절대 뺏기지 않을 것이다.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일본 국내 인디 일렉 레이블들은 이미 20여년 전부터 전문화된 프로듀서/엔지니어를 구축하고 저마다 독특한 색깔을 띈 일렉 프로듀싱 시스템을 가동하고 있는데, 다양하게 세분화된 일렉 장르들을 프로페셔널하게 전부 소화해낼 수 있는 음악 저변과 인프라를 바탕으로 오늘날 미국-유럽을 제외한 제3세계 국가들 중에서 가장 많은 글로벌 일렉 아티스트를 배출하고 있는 나라가 바로 일본인 것이다. 인디 장르에서 트렌드 장르로 신분 상승된 덥스텝만 해도 그렇다. 수도 도쿄에서 최북단 삿포로까지 세계적 덥스텝 프로듀서들까지 초청되어 로컬 뮤지션들과 함께 고급 라이브들을 접할 수 있는 크고 작은 덥스텝 파티들은 우리에겐 여간 부러운 것들이 아닐 수 없다(UK 덥의 산증인 아바 샨티-이가 현재 일본 전국 투어중).       

여담이지만 예전에 일본 익스페리멘탈 레이블 히푸미 레코딩스(요절한 여성 익스페리멘탈 뮤지션 HONZI의 솔로 앨범이 나왔었던) 전 사장을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 이 친구에게 추천할만한 일본 일렉 뮤지션 한 명 소개시켜달라고 하니 주저하지 않고 이름 하나를 종이에 적어 보여주면서 말했다. "꼭 들어봐라~ 꽤 괜찮은 음악 하는 놈이다~"

'GOTH-TRAD'

일본 인디 익스페리멘탈 레이블 Body Electric Records와 Popgroup Recordings을 통해 자국에서 이미 세 장의 정규앨범을 발매한 일본 오사카 출신의 베테랑 프로듀서 GOTH-TRAD(본명: 마루야마 다케야키)는 2005년 한-일 우호 음악 페스티벌에도 디제이로 참여한 적이 있어 국내에도 적잖은 팬들이 존재할 거라 추측되는데, 당시 일본 일렉 씬에서도 비주류로 통하던 그가 영국 유명 레이블 Deep Medi(작년 성공적인 일본투어를 마쳤던 영국 본토 출신의 젊은 덥스텝 거성 SILKIE가  소속해 있는 바로 그 레이블)와 계약에 성공하고 정규 앨범까지 발매하는 등 작년부터 떼거지로 유럽 일렉 씬에 진출을 모색하던 젊은 일본 덥스테퍼들보다 가장 안정적으로 세계 진출에 성공하게 된 이유는 국내보다 수입 보장 없는 해외 투어를 홀로 고수하며 프랑스, 영국, 미국 등지에서 해외진출을 위한 자기 준비를 끊임없이 해왔기 때문이다. 그는 이미 1999년 혼자 프랑스 전국투어를 감행했으며, 이후에도 잦은 해외투어를 통해 세계진출을 혼자 꾸준히 모색하는 중 2005년 일본에서 발매된 [The Inverted Perspective] 앨범에 삽입된 "Back To Chill"이 런던 덥스텝 DJ들 사이에서 자주 애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곧바로 런던으로 이동, 오랜 노력 끝에 2007년 Deep Medi 레이블을 통해 12인치 싱글 "Cut End"를 발표하는 데 성공하면서 그의 네임벨류를 글로벌한 영역으로 넓히기 위한 초석을 마련하게 되었던 것이다. 

일부에서는 '덥스텝의 원조' 라고까지 호들갑 아닌 호들갑을 떨만큼 그가 초기 일본 레이블 시절에 발표했던 앨범들은 분명 음악적 가치를 다시 거론해도 손색이 없는 완성도를 지니고 있다.  특히 덥스텝의 '메인스트림화(?)' 가 도래하기 전 발표되었던 [Mad Raver's Dance Floor (2005)], [The Inverted Perspective (2005)] 같은 앨범들은 GOTH-TRAD만이 가진 독특한 비트 감각과 앱스트랙트 사운드 디자인 능력을 풀모드로 보여줬던 앨범들인데, 날카롭게 커팅/글리취된 불규칙 비트들이 미스테리한 무드의 아방가르드 재즈풍 멜로디 샘플 음향들과 함께 뒤섞이면서 자아내는 독특한 전자 심상들은 서양권 일렉음악에서 쉽게 접할 수 없었던 일본 일렉 뮤지션다운 개성과 에너지가 넘쳐났었다. 마치 일본 일렉트로닉 뮤직 씬의 현주소를 대변해주는 듯 탄탄한 기본기, 독특한 음악 취향, 완벽한 프로듀싱 능력 등이 모두 함축되어있는 그의 초기 앨범들 안에서 매 트랙 혹은 매 프레이즈마다 특별한 루트 없이 마구잡이로 엮어낸 듯 불규칙하게 정렬된 (하이햇+킥드럼+스네어) 트리플 콤보 비트 패턴들이 오묘하게 창출하는 스피디한 그루브는 분명 드럼앤베이스식 그루브도 아닌 바로 오늘날 우리가 덥스텝이라고 단정짓곤 하는 그런 느낌의 펑키한 그루브에 다름 아니었다. 

GOTH-TRAD의 세계 진출 첫번째 풀렝쓰 앨범 [New Epoch]은 GOTH-TRAD 음악의 트레이드마크라고 할 수 있는 일본식 앱스트랙트 앱스트랙트/익스페리멘탈 일렉트로니카 제조공법(자신의 가내수공법에 의해 직접 주조된 듯한 독특한 음색의 앱스트랙트 샘플링, 맺고 끊음이 확실한 디지털 프로덕션에 의해 날카롭게 구사되는 사운드 텍스쳐 등등)과 UK 베이스/덥스텝의 불규칙한 비트 패턴이 맞물려 보통 댄스 클럽에서는 들을 수 없는 '실험적 풍모'/'앰비언스 지향'의 덥스텝 사운드들로 가득 차 있다. 이 앨범은 PINCH & SHACKLETON의 콜라보 앨범이나 초기 덥스텝/가라지 파이오니어들의 12인치 싱글에서 들을 수 있었던 미니멀하면서도 거칠게 짜여진  타악기/드럼 레이어들을 주요 비트 소재로 삼고 있는데, 실제로 그는 변절 전 SKRILLEX처럼 신쓰 베이스로 덥스텝 엑센트를 한껏 부려보는 "Airbreaker", RUSKO식 더티/와블 베이스와 그라임톤 신쓰 리프, 루츠 레개 거장 막스 로메오의 피처링 덥 보컬을 결합하여 덥스텝다운 폼을 제대로 잡는 "Babylon Fall" 등의 트랙에서 보여지는 것처럼 현재 덥스텝 매니어들의 입맛에 맞추기 위해 신경쓴 듯한 '완전 덥스텝'틱 어프로치들을 여지껏 선보였던 작품들 중 가장 강한 어조로 이번 앨범에서 드러내 보인다.  

[New Epoch]는 GOTH TRAD만의 실험적인 취향을 '덥스텝'이라는 골격 안에서 본격적으로 정형화시켜내기 시작한 앨범이지만, 그가 이번 앨범을 통해 취해보는 노림수, 즉 '오직 나만이 할 수 있는 독특한(혹은 실험적인) 덥스텝 어프로치' 에 대한 강박관념으로 인해 '동적인 피드백이 아닌 정적인 피드백을 요하는' , 즉 '집중력을 요구하는 리스닝용 음악'으로 이 앨범을 지나치게 스타일링함으로써 오히려 덥스텝이 근본적으로 지녀야 할 비트감, 비트 텍스쳐, 그루브 등의 고유 요소들을 상당 부분 죽여놓고 있다. 서사적 테마와 SF/미스테리 무드를 한껏 잡아내려는 어프로치는 상당히 깔끔하고 빈틈없어 보이지만 유니크한 텍스쳐와 사운드스케잎을 잡아내기 위해 조성된 프레임워크(framework) 안에 더불어 담겨진 비트들은 (비록 초기 덥스텝의 원초적 펀더멘탈 요소들을 추구하는 듯 하면서도) 정작 텍스쳐/사운드스케잎에 압도/함몰되어 덥스텝 비트다운 특이한 무브먼트/질감/변칙패턴을 또렷하게 보여주지 못한다. 우리가 10여년 전 접했던 IDM형 드럼앤베이스 명작들(특히 PHOTEK의 [Modus Operandi])과 덥스텝 명작들(특히 BURIAL의 앨범들) 등이 보여줬던 '비트'와 '사운드스케잎/사운드텍스쳐' 간의 완벽한 밸런스의 사례들을 떠올릴 때 [New Epoch]는 이러한 밸런스가 완벽하게 이뤄진 앨범은 아니라는 것이다. 행여 GOTH-TRAD가 '나는 덥스텝의 클리쉐이가 되기 싫다' 라고 말했다 하더라도, 그라임 스타일의 신쓰 아날로그 음이 자잘한 비트들을 잡아먹는다던지("Mirage"), 덥스텝 비트라고 하기 애매할 만큼 지나치게 규칙적으로 떠들어대는 킥드럼+스네어 비트 콤비네이션 ("Anti Grid")이라든지... 그리고 때때로 터지는 와블 베이스톤("Babylon fall", "Seeker")이나 퍼커션 비트("Cosmos", "New Epoch")마저 SHACKLETON, PINCH, RUSKO 등 덥스텝 파이오니어/거장들이 줄기차게 취해오던 정통 UK베이스/가라지 고유의 단순하면서도 원시적인 비트 질감/어프로치들과 비교할 때 귀에 확 꽂힐만큼 독특한 그루브나 캐취감을 선사하지 못하는 등 '아시아 덥스텝의 개척자'다운 기세를 느낄만한 특이점들을 앨범에서 크게 발견할 수 없다. 한마디로 말해, 간지나는(=스타일 있는) 분위기와 템포, 앰비언스를 일본 특유의 날카로운 커팅 기술과 프로듀싱 하에서 잡아내는 데에는 나무랄 데 없는 성공을 거두었으나 정작 덥스텝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변칙적 비트 미학이나  클래식 UK 베이스 비트에 필적할만한 비트 텍스쳐를 독창적으로 잡아내는 데에는 다소 실패한 앨범으로 판단된다. 특히 [New Epoch]이 아닌 전작들 특히 다이내믹한 비트 패턴과 원시적 비트 텍스쳐가 신비로운 사운드스케잎과 함께 절묘한 밸런스를 이루어낸 [Mad Raver's Dance Floor]의 억양 확실한 베이스+드럼/퍼커션 톤의 에너지를 여전히 기억하고 있는 팬들에게 단편적이면서도 억양 약한 비트 나열로 일관된 [New Epoch]는 여러모로 실망스러움으로 다가올 수 밖에 없는 성질의 작품인 것이다.


RATING: 66/100

written by BK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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